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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과 완벽한 조건이라는 환상이 깨지면... <그대 웃어요> 속 남녀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는 ‘환상 속의 그대(결혼)’가 깨지면서 시작된다. 남자가 품었던 환상은 첫사랑의 그녀다. 현수는 의대생 정경을 캠퍼스에서 첫눈에 보고 반한다. 몇 차례 고백을 하지만 번번이 차이고, 주변을 빙빙 맴돌며 혼자서만 천만번을 마주치는 그런 사랑을 한다. 그것도 장장 8년간이나. 현수가 DMZ를 능가하는 순수청정남일지는 몰라도 그의 사랑은 공상과 망상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현수는 실제 정경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낸 정경을 사랑한 것에 더 가깝다. 대상이 있으나 상대해 주지 않으니 현수의 그녀가 오로지 상상의 피조물이라 해도, 그건 물론 현수 탓은 아니다. 하지만 정경이와 현수가 진짜로 사귀었던들 과연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까? 현수가 그려왔던 아름답고 희생적인 의사선생님, 서정경의 본모습은 자기중심적이고 가족은 물론 관심 밖의 인간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으며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이기적인 인간이니 말이다. 환상과 현실의 괴리. 이것이 짝사랑의 맹점이자 그 많은 첫사랑이 아름답고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의 첫사랑은, 짝사랑이거나 한때 지나가는 설렘 정도일 텐데, 그런 경우 대상을 상상 속에서 마음껏 미화하게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품었던 환상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플러스, 조건을 갖춘)과의 결혼이 행복을 보장해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다. 이 기대는 드라마의 시작부터 와장창 무너져 버린다. 신체포기각서(?)를 쓸 정도로 별도 달도 다 따주마 했던 한세는 정인이 아버지 회사 부도 소식에 뒤도 안 돌아보고 내뺀다. 나를 끔찍이 좋아해주는 사람이라면 끝까지 함께 할 줄 알았던 정인은 한세의 배신으로 파혼의 상처보다 더한 진실을 깨닫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결혼도 파혼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 파혼은 정인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남겼을지언정 실연의 아픔을 남긴 것은 아니었다. 시집 잘 가면 그만이라는 모토로 정인이 공부는 안했을지 몰라도 현실을 인식하고 본질을 파악하는 직감은 타고 난 듯하다. 일방적으로 받는 사랑의 공허함을 깨달은 정인은 서로 바라보고 나누는 사랑을 원하게 된다. 주기만 했던 사랑을 해온 현수와 받기만 했던 정인이의 만남. 그런데 이번엔 정인이가 먼저 마음을 준다. 처절하게 차였으나 첫사랑의 그림자를 아직 지우지 못하던 현수의 마음에 다른 누군가를 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 정인의 짝사랑이 현수의 그것만큼 외로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혼자 하는 사랑의 고통을 경험한다. 아린 마음을 달래고, 참고 기다리고 아파하는 시련을 겪으며 정인은 조금씩 성장한다. 철부지 막내딸이었던 정인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 씀씀이가 훌륭한 현수에게 어울리는 사람으로 점차 달라지는 중이다. 현수 또한 이번엔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를 알아감에 따라 점점 빠져드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 팬더가 된 얼굴로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버스에 무임승차하는 광년이부터, 건방지고 제멋대로인 파혼녀를 거쳐, 어찌어찌 동거를 하게 되면서 정인에 대한 현수의 감정과 생각은 여러 가지 변화를 겪는다. 가족을 생각해 한세 엄마의 험한 말도 묵묵히 듣는 모습이 안쓰럽고, 불쑥불쑥 황당한 행동들에 당황하고, 서정경이 아니라면서 정확히 볼 것을 요구하는 정인이의 당돌함에 정곡을 찔리고, 열심히 일하는 걸 보면 대견하고, 한세랑 같이 있을 땐 뭔가가 치밀어 오르고...정경을 동경하던 열렬한 마음과는 완전히 다른, 뭔가 계속 나아가는 마음. 상대에 맞춰 달라지는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강현수, 지금 나랑 한 번 해보자는 거야! 이한세, 그래 볼까?
by 앤서니 버지스
<시계태엽 오렌지>의 주인공이자 화자(話者)는 알렉스라는 15살의 청소년이다. 그는 또래의 비행청소년 세 명과 함께 마약을 탄 우유를 파는 밀크바에 모여앉아 “오늘은 어떤 나쁜 짓을 할까?” 궁리하고 날마다 온갖 비행을 저지른다. 그 비행은 악동들이 벌이는 장난 수준이 아니다. 폭행은 물론 절도, 강간까지 서슴지 않는다. 할머니들에게 술을 사서 알리바이까지 만들어가며 주도면밀하게 범행을 저지르던 알렉스는 어느 노파의 집을 털다가 경찰에 붙잡혀 감옥에 가게 된다. 그를 대장으로 따르던 동료들은 모두 도망가고 혼자 잡힌 알렉스는 다친 노파가 죽는 바람에 중형을 선고받는다. 2년간 감옥생활을 하던 알렉스는 죄수들 사이의 폭력사건에 휘말려 다시 죄수 한 명의 죽음에 연루되고 그 바람에 원치 않는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내무부 장관이 야심차게 준비한 교정 프로그램(루드비코 요법)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는 알렉스. 2주간의 치료를 견디기만 하면 바로 출옥 가능하다는 말에 선뜻 사인을 한 알렉스는 상상 이상의 혹독한 경험을 한다. 약물을 주입 받고 의자에 묶인 채로 차마 눈 뜨고 못 볼 폭력 비디오를 몇 시간이고 강제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비디오를 보는 내내 구토를 비롯한 신체적 고통을 느끼던 알렉스는 프로그램을 마칠 때쯤엔 조금만 폭력적인 생각을 해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기에 이른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알렉스 예전에 폭행했던 노인과 경찰이 된 옛 동료 딤에게 구타를 당한다. 그럼에도 교정으로 인해 반격조차 할 수 없이 무기력해진 알렉스는 고민 끝에 결국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길을 택한다. 여기저기 부러지고 깨졌지만 구사일생 목숨을 건진 알렉스는 그의 자살미수로 인해 교정 프로그램에 대한 반대 여론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결국 정부는 알렉스를 교정 전의 상태로 복구한다. 이 소설에는 같은 제목의 또 다른 책이 등장한다. 소설 속 어느 작가가 집필하고 있던 <시계태엽 오렌지>의 내용은 태엽을 감아 움직이는 장난감처럼 정해진 행동만 반복하도록 강요당하는 현대인과 개인의 사고와 정신까지 통제하려는 전체주의적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 속 작가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알렉스 일당에게 아무 이유 없이 폭행을 당하고 그의 아내는 윤간을 당한다. 그 충격으로 그의 아내는 자살을 하고 만다. 이와 같은 비극을 겪었음에도 작가는 집필 중이던 책을 출간한다. 그런데 감옥에서 나온 뒤 비참한 신세가 된 알렉스가 우연히 그의 집에 다시 찾아온다. 작가는 알렉스가 그때의 범인임을 알아보지 못하고 보살펴 주는데 이 부분은 소설에서 가장 스릴이 넘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소설 속 작가의 평소 신념에 따르면, 고통에 못 이겨 선한 행동을 하도록 알렉스를 교정한 것은 비인간적이며 비윤리적인 일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개인적인 원한과 비극을 고려하면, 두 번 다시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강제적으로 교정하는 것이 옳은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알렉스는 진짜 머릿속에 뇌수가 아니라 오렌지 즙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순간의 쾌락만을 추구한다. 범죄를 저지른 뒤 죄의식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거니와 일말의 주저함이나 미안한 마음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오렌지 머리를 가진 청소년은 억지로라도 태엽을 감아주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처럼 주인공 알렉스를 구제불능의 악당으로 그린 것은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알렉스가 희생자들에게 아무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하듯이 독자 또한 알렉스에게 감정이입이 되거나, 약간의 동정심도 느끼기 힘들다. 루드비코 요법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알렉스가 비로소 자신의 범죄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돌아보게 부분은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루드비코 요법을 통해 정말 가해자가 피해자의 고통을 느끼게 할 수 있다면, 현실 세계의 형벌에도 적용하고 싶을 정도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 그런데 자유의지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에 따른 책임 또한 물어야 할 것이다. 선악의 판단을 내리게 하는 초자아를 결여한 인간을 과연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교정 전의 알렉스는 악행을 선택하는 의지를 가졌으나 윤리의식은 눈곱만큼도 없는 오렌지 인간이었다. 때문에 수감생활을 끝까지 마치더라도 알렉스가 잘못을 뉘우칠 거라는 기대를 할 수가 없다. 이러한 소설의 배경에서 선과 악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 주어진다. 알렉스를 회개의 길로 인도하려는 교도소 신부의 말이다. “착하게 되는 것이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6655321번. 착하게 된다는 것이 끔찍한 일일 수도 있어. 말하고 보니 자기모순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신은 무엇을 원하시는 걸까? 신은 선 그 자체와 선을 선택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을 원하시는 걸까? 어떤 의미에서는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강요된 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 어떤 의미에서는 윤리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제거당하겠다는 선택을 내릴 때, 넌 진짜로 선을 선택한 것이겠지.” 악을 선택할 수 없는 완벽한 선의 사회와 알렉스와 같은 절대적 악이 엄연히 존재하는, 선택의 사회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무엇을 택할 것인가.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죄를 짓는, 그런 인간을 창조한 신의 의지를 묻기 전에, 보다 평화로운 사회를 위한 인간의 선택을 작가는 묻고 있는 듯하다. 선택의 자유를 빼앗음으로써 선한 인간으로 만들려는 소설 속 프로그램은 분명 권력이 사회 통제를 편리하게 할 의도로 만들어졌다. 또한 강요된 선은 진정한 가치를 지닌 선이라 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인간의 의지에 의한, 회의와 갈등을 거쳐 비로소 선택되는 선행이야말로 진정 인간에게 요구되는 선일 것이다. 그러나 알렉스와 같은 사람에게서 선택의 능력을 제거하는 것이 무조건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아질 가능성이 없는 인간에게서 선택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일까? 공공의 선을 개인의 선보다 우위에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알렉스가 주인공이자 화자이기 때문에 그가 하지 않는 이야기는 알 수 없다. 15살짜리 청소년이 구제불능의 악당이 된 배경을 알렉스는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모를 바라보는 그의 생각, 그에 대한 부모의 태도를 통해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알렉스의 부모는 아들이 잘못되어 가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쩌지 못한다. 알렉스가 감옥에 가고 난 뒤 그들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듯 냉큼 하숙생을 받아들인다. 거기다 뜻하지 않게 일찍 돌아온 아들을 반기기는커녕 하숙생 내보낼 걱정부터 한다. 알렉스의 부모가 아들을 바로 잡기 위해 아무 노력도 안한 건 아닐 테지만 일찌감치 포기한 것은 확실하다. 알렉스의 부모는 무기력하다. 사회에 순응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들에게 더 나은 삶을 위한 의지나 희망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이런 부모를 보며 어쩌면 알렉스는 시스템에 끼워 맞춘 삶을 거부하는 방편으로 극단적인 비행청소년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무력해지기 싫어서 폭력을 택하고, 현실을 잊기 위해 환각(마약)을 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알렉스에게는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희망이 전혀 없다. 그에게 의미 있는 것은 오로지 현재뿐이다. “아, 이제 어떻게 될까?”라고 말하는 소년은 자신의 삶조차 방관하는 듯 보인다. 감옥에 갇힌 알렉스도 정부가 고용하는 대로 경찰이 된 친구 딤도, 그저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데, 방법만 다를 뿐 무기력하기는 부모세대와 별 다를 바 없다. 청소년 범죄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고민하기 보다는 간편하고 즉각적인 해결책 마련에 급급한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선과 악의 선택권 여부나, 선/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하는 문제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의지박약의 시대상이다.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노동과, 내일의 희망이 박탈된 생활, 달라질 수 있다는 기대를 품을 수 없는 사회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굳이 빼앗지 않아도 적극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 삶으로 인도한다. 앤서니 버지스는 기계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가치관이나 윤리의식이 희박해지고 마약과 술에 의지하며 폭력과 성희에 몰입하는 현대인은 태엽인형과 다름없다고 여긴 듯하다. 태엽인형 인간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느슨해진 태엽을 다시 빡빡하게 감아줄 그 무엇이 아니라, 스스로 태엽을 제거하게 만드는 각성일 것이다. 약물이나, 프로그램, 혹은 지독한 고문이나, 자포자기적 자살시도를 통해서가 아닌, 개인의 치열한 사유와 자기반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각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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