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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월=연우(?)의 정체성 확인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해품달>의 더딘 전개 때문에 화딱지가 나서 본격 정치+멜로+사극을 뒤져보다 보니, 나의 그물에 <보보경심>이라는 중드가 걸려 들었다. 타임슬립이라는 판타지 설정임에도 역사적 사실을 많이 훼손하지 않으며, 300년 전으로 거슬러 간 여주인공과 황자들간의 로맨스가 극의 주된 내용이지만, 황자들을 둘러싼 왕권다툼 이야기도 흥미롭다는 평을 들은 터라, 중국 드라마임에도 호기심이 생겼다. <해품달>로 인해 생긴 답답증을 풀어줄 뭔가가 <보보경심>에 있을 듯했다. 머릿발에 기대기는커녕 그 어떤 미남자도 다 똑같이(대머리) 만들어 버리는 변발의 높은 장벽를 극복하고, 초반 몇 차례의 유치한 에피소드만 잘 견디고 나면 휘몰아치듯 보게 될 거라는 누군가의 추천을 무작정 믿고, 건성건성 보더라도 일단 15회까지만 넘겨보자 다짐하고 보기 시작했다.
변발에 적응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저 둥그런 뒤통수를 가진 황자들이 부러웠을 뿐. 그보다는 더빙이 더 문제였다. 묘하게 입 모양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목소리가 처음엔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게다가 여전히 좀 촌스러운 듯한 편집과 촬영, 도무지 용서가 안 되는 CG, 잦은 독백적 대사도 솔직히 손발이 오그라들 지경까지는 아니어도 낯간지럽게 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정말 누군가의 말대로 한 회, 한 회 지나갈수록 자연스레 적응 되더라(이건 대충대충 봐서일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주인공 마이태 약희에게 주어진 상황과 그에 따른 선택과 행동이 점차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역사 상 승자와 패자를 알고 있음에도,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어 놓거나, 아니 그 정도의 큰 변화가 아니라, 다만 누군가의 목숨을 살리려는 아주 소극적인 저항조차도 약희는 조심스럽다. 끝을 알고 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가련한 여주인공은 그래서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이방인의 삶을 살아간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조심하며 걷는 마음을 뜻하는 드라마의 제목은 낯선 시간 속에 던져진 여주인공의 속내를 그대로 대변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금세 쓰러질 듯 쇠약해지는 약희의 근원적 병명은 아무래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지 못해 쌓인 화병이 아닐까 싶다(물론 7년 동안 빨래하느라 생긴 육체적 피로도 한 몫 했으리라).
약희의 이런 소극적인 태도가 아주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 운신의 폭이 제한적인 여인의 몸이라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 짐작 되기는 한다. 하지만 알고 있는 역사와 현대 사회에서 익힌 지식과 경험을 통해 뭔가 반전을 꾀할 수도 있을 법 한데, 약희는 내내 속으로만 끙끙댄다. 특히 8황자에게 4황자를 경계하라고 넌지시 알려주는 정도로 8황자의 운명이 바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점은 너무나 안이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왕자들의 난을 막기 위해선 의심병 황제 강희제를 움직이는 편이 가장 효율적이었을 텐데, 머리가 좋기는 하지만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적 감각을 갖추지 못한 약희는 끝까지 관찰자에 머물고 만다. 약희의 어쩌면 순진한(경계하라는 조언이 바로 8황자가 황위에 대해 좀 더 조심스레 다가가게 만들 거라는 판단) 참견이 나비효과처럼 훗날 예기치 않은 결과를 낳게 되고, 그 원인이 자신의 아주 순진한 생각 때문이었다는 걸 깨닫고 절망한다는, <보보경심> 유일의 반전(?)은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 타임슬립의 설정을 생각하면 조금 단조롭다 싶다.

약희와 8황자간의 닭살 돋는 로맨스가 정리되고 본격적으로 왕자의 난이 조짐을 보이는 15회 이후부터 슬슬 집중해서 시청하게 되는데, 약희와 4황제의 로맨스 부분 또한 대충 넘기고 나면 드디어 절호의 기회를 노리며 와신상담하던 4황제가 황위를 향해 정중동하는 흥미진진한 황위쟁탈전이 펼쳐지며 진짜 재미가 시작된다(23,24부 이후다). 황위에 연연하지 않는 척 농사를 지으며 강희제의 마음을 안심시킨 4황자가 제사(천신제?) 지내러 다녀오라는 황제의 명을 즉각 따르지 않고 황제의 붕어를 기다렸다가 세상을 뜨자마자 황궁을 군사들로 포위하고 정권을 단숨에 장악하는 과정은 특히나 재미있다. 4황자는 즉위하고 나더니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카리스마를 본격적으로 내뿜으며 정적(황자)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간다. 울분을 참으며 바짝 엎드려 있었던 기간(약희가 빨래했던 대략 7년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8황자 일당에 대한 원한도 깊어, 약희와 의자매를 맺었던 옥단이 9황자의 밀정이었다는 이유로 팽형(가마솥에 넣고 삶아 죽이기)에 처할 만큼 잔인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옹정제 4황자 윤진은 자신과 황권다툼을 벌였던 형제들과 신하들에게는 엄격했으나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나라의 곳간을 살뜰히 채워 넣은 것은 물론, 후궁을 많이 들이지 않는 등 근면/절제하는 황제로 평가 받는다. 백성의 입장에선 훌륭한 지도자였을 듯하다.
약희는 다소 수동적이긴 하지만 옳고 그름에 대한 주관만은 뚜렷한 여인이었다. 때문에 형부 8황자와의 불륜(?)도, 10황자, 14황자와의 경계성 우정도. 13황자와 이루는 소울메이트 관계도, 4황자(옹정제)와의 밀고 당기는 연애도 큰 거부감 없이 용납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후의 승자, 옹정제와 시간여행자 약희의 결말은 행복하다 할 수 없지만 그만큼의 여운을 남긴다. “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에요. 제 이름은 장효에요.”라고 막판에 황제에게 고백하는 약희와 그녀가 눈을 감은 뒤 다른 세상에서 눈을 떴음을 어렴풋이 감지하는 황제. 두 사람의 인연은 시공을 초월한다는 드라마의 결론 때문에 보보경심2가 가능한 듯싶다. 물론 현대로 시간을 옮겨 진행되는 보보경심은 변발의 압박보다 더한 촌스러움의 치명적 장애로 인해 극복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보보경심>은 중드에 대한 선입견을 날려주기에 썩 괜찮은 작품임에 틀림없다. 다만, 이어서 보기에 선뜻 손이 가는 다른 작품이 없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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