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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by 앤서니 버지스 

<시계태엽 오렌지>의 주인공이자 화자(話者)는 알렉스라는 15살의 청소년이다. 그는 또래의 비행청소년 세 명과 함께 마약을 탄 우유를 파는 밀크바에 모여앉아 “오늘은 어떤 나쁜 짓을 할까?” 궁리하고 날마다 온갖 비행을 저지른다. 그 비행은 악동들이 벌이는 장난 수준이 아니다. 폭행은 물론 절도, 강간까지 서슴지 않는다. 할머니들에게 술을 사서 알리바이까지 만들어가며 주도면밀하게 범행을 저지르던 알렉스는 어느 노파의 집을 털다가 경찰에 붙잡혀 감옥에 가게 된다. 그를 대장으로 따르던 동료들은 모두 도망가고 혼자 잡힌 알렉스는 다친 노파가 죽는 바람에 중형을 선고받는다. 2년간 감옥생활을 하던 알렉스는 죄수들 사이의 폭력사건에 휘말려 다시 죄수 한 명의 죽음에 연루되고 그 바람에 원치 않는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내무부 장관이 야심차게 준비한 교정 프로그램(루드비코 요법)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는 알렉스. 2주간의 치료를 견디기만 하면 바로 출옥 가능하다는 말에 선뜻 사인을 한 알렉스는 상상 이상의 혹독한 경험을 한다. 약물을 주입 받고 의자에 묶인 채로 차마 눈 뜨고 못 볼 폭력 비디오를 몇 시간이고 강제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비디오를 보는 내내 구토를 비롯한 신체적 고통을 느끼던 알렉스는 프로그램을 마칠 때쯤엔 조금만 폭력적인 생각을 해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기에 이른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알렉스 예전에 폭행했던 노인과 경찰이 된 옛 동료 딤에게 구타를 당한다. 그럼에도 교정으로 인해 반격조차 할 수 없이 무기력해진 알렉스는 고민 끝에 결국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길을 택한다. 여기저기 부러지고 깨졌지만 구사일생 목숨을 건진 알렉스는 그의 자살미수로 인해 교정 프로그램에 대한 반대 여론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결국 정부는 알렉스를 교정 전의 상태로 복구한다. 



이 소설에는 같은 제목의 또 다른 책이 등장한다. 소설 속 어느 작가가 집필하고 있던 <시계태엽 오렌지>의 내용은 태엽을 감아 움직이는 장난감처럼 정해진 행동만 반복하도록 강요당하는 현대인과 개인의 사고와 정신까지 통제하려는 전체주의적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 속 작가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알렉스 일당에게 아무 이유 없이 폭행을 당하고 그의 아내는 윤간을 당한다. 그 충격으로 그의 아내는 자살을 하고 만다. 이와 같은 비극을 겪었음에도 작가는 집필 중이던 책을 출간한다. 그런데 감옥에서 나온 뒤 비참한 신세가 된 알렉스가 우연히 그의 집에 다시 찾아온다. 작가는 알렉스가 그때의 범인임을 알아보지 못하고 보살펴 주는데 이 부분은 소설에서 가장 스릴이 넘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소설 속 작가의 평소 신념에 따르면, 고통에 못 이겨 선한 행동을 하도록 알렉스를 교정한 것은 비인간적이며 비윤리적인 일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개인적인 원한과 비극을 고려하면, 두 번 다시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강제적으로 교정하는 것이 옳은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알렉스는 진짜 머릿속에 뇌수가 아니라 오렌지 즙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순간의 쾌락만을 추구한다. 범죄를 저지른 뒤 죄의식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거니와 일말의 주저함이나 미안한 마음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오렌지 머리를 가진 청소년은 억지로라도 태엽을 감아주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처럼 주인공 알렉스를 구제불능의 악당으로 그린 것은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알렉스가 희생자들에게 아무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하듯이 독자 또한 알렉스에게 감정이입이 되거나, 약간의 동정심도 느끼기 힘들다. 루드비코 요법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알렉스가 비로소 자신의 범죄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돌아보게 부분은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루드비코 요법을 통해 정말 가해자가 피해자의 고통을 느끼게 할 수 있다면, 현실 세계의 형벌에도 적용하고 싶을 정도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 그런데 자유의지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에 따른 책임 또한 물어야 할 것이다. 선악의 판단을 내리게 하는 초자아를 결여한 인간을 과연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교정 전의 알렉스는 악행을 선택하는 의지를 가졌으나 윤리의식은 눈곱만큼도 없는 오렌지 인간이었다. 때문에 수감생활을 끝까지 마치더라도 알렉스가 잘못을 뉘우칠 거라는 기대를 할 수가 없다. 이러한 소설의 배경에서 선과 악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 주어진다. 알렉스를 회개의 길로 인도하려는 교도소 신부의 말이다.


“착하게 되는 것이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6655321번. 착하게 된다는 것이 끔찍한 일일 수도 있어. 말하고 보니 자기모순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신은 무엇을 원하시는 걸까? 신은 선 그 자체와 선을 선택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을 원하시는 걸까? 어떤 의미에서는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강요된 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 어떤 의미에서는 윤리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제거당하겠다는 선택을 내릴 때, 넌 진짜로 선을 선택한 것이겠지.”     


악을 선택할 수 없는 완벽한 선의 사회와 알렉스와 같은 절대적 악이 엄연히 존재하는, 선택의 사회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무엇을 택할 것인가.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죄를 짓는, 그런 인간을 창조한 신의 의지를 묻기 전에, 보다 평화로운 사회를 위한 인간의 선택을 작가는 묻고 있는 듯하다. 선택의 자유를 빼앗음으로써 선한 인간으로 만들려는 소설 속 프로그램은 분명 권력이 사회 통제를 편리하게 할 의도로 만들어졌다. 또한 강요된 선은 진정한 가치를 지닌 선이라 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인간의 의지에 의한, 회의와 갈등을 거쳐 비로소 선택되는 선행이야말로 진정 인간에게 요구되는 선일 것이다. 그러나 알렉스와 같은 사람에게서 선택의 능력을 제거하는 것이 무조건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아질 가능성이 없는 인간에게서 선택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일까? 공공의 선을 개인의 선보다 우위에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알렉스가 주인공이자 화자이기 때문에 그가 하지 않는 이야기는 알 수 없다. 15살짜리 청소년이 구제불능의 악당이 된 배경을 알렉스는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모를 바라보는 그의 생각, 그에 대한 부모의 태도를 통해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알렉스의 부모는 아들이 잘못되어 가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쩌지 못한다. 알렉스가 감옥에 가고 난 뒤 그들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듯 냉큼 하숙생을 받아들인다. 거기다 뜻하지 않게 일찍 돌아온 아들을 반기기는커녕 하숙생 내보낼 걱정부터 한다. 알렉스의 부모가 아들을 바로 잡기 위해 아무 노력도 안한 건 아닐 테지만 일찌감치 포기한 것은 확실하다.


알렉스의 부모는 무기력하다. 사회에 순응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들에게 더 나은 삶을 위한 의지나 희망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이런 부모를 보며 어쩌면 알렉스는 시스템에 끼워 맞춘 삶을 거부하는 방편으로 극단적인 비행청소년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무력해지기 싫어서 폭력을 택하고, 현실을 잊기 위해 환각(마약)을 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알렉스에게는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희망이 전혀 없다. 그에게 의미 있는 것은 오로지 현재뿐이다. “아, 이제 어떻게 될까?”라고 말하는 소년은 자신의 삶조차 방관하는 듯 보인다. 감옥에 갇힌 알렉스도 정부가 고용하는 대로 경찰이 된 친구 딤도, 그저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데, 방법만 다를 뿐 무기력하기는 부모세대와 별 다를 바 없다. 청소년 범죄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고민하기 보다는 간편하고 즉각적인 해결책 마련에 급급한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선과 악의 선택권 여부나, 선/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하는 문제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의지박약의 시대상이다.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노동과, 내일의 희망이 박탈된 생활, 달라질 수 있다는 기대를 품을 수 없는 사회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굳이 빼앗지 않아도 적극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 삶으로 인도한다. 앤서니 버지스는 기계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가치관이나 윤리의식이 희박해지고 마약과 술에 의지하며 폭력과 성희에 몰입하는 현대인은 태엽인형과 다름없다고 여긴 듯하다. 태엽인형 인간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느슨해진 태엽을 다시 빡빡하게 감아줄 그 무엇이 아니라, 스스로 태엽을 제거하게 만드는 각성일 것이다. 약물이나, 프로그램, 혹은 지독한 고문이나, 자포자기적 자살시도를 통해서가 아닌, 개인의 치열한 사유와 자기반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각성 말이다. 

# by 졸리 | 2009/10/13 16:54 | 책을 읽고 | 트랙백 | 덧글(1)
멋진 신세계
 by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의 배경이 되는 미래 세계는 인공수정과 배양을 통해 필요한 인간을 대량생산 해내는, 철저히 계획된 사회이자 계급사회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개개인의 일생이 전부 계획대로 진행된다. 알파계급에서 입실론까지 세밀하게 나뉜 계급에 따라 생산된 태아는 잠재의식 교육을 통해 계급에 따른 생각과 행동 양식이 주입되고, 주어진 일을 수행하며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간다. 정신적인 번민 따위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분노, 슬픔, 질시, 환멸, 고독, 사랑과 같은 극렬한 인간적 감정이 나타날 때는 소마라는 약(일종의 신경안정제이자 환각제?)을 복용하면 그만이다. 극도로 통제되고 어떠한 격변도 기대할 수 없는,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하고 안전하며, 완전히 개방적인 성희와 촉각영화 같은 쾌락이 장려되는 사회는 분명 훌륭하다. 하지만 불행할 권리조차 없는 사회에서 사는 인간은 정말 행복한 것일까?


소설에는 이러한 완벽한 체제에 순응하지 못하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알파 플러스 계급으로 태어났으나 알파 계급에 준하는 신체적 조건을 갖추지 못해(대량생산에서 종종 발생하는, 일종의 불량품)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는 버나드다. 다른 알파 계급들과의 차이를 절감한 나머지 소외감과 고독을 느끼는 그는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실존’에 대해 어설프게나마 자각한다. 부모/자식 간의 유대감이나, 결혼을 통한 애착관계의 형성을 적극적으로 막고,  ‘만인을 위한 만인’이라는 표어를 내세우며 진정한 의미의 사랑(육체적 관계가 아닌 정신적인 교감)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사회에서 그는 레니나(알파계급의 아름다운 여성)가 자신을 특별하게 여겨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는다. 다른 사람과 구별하여 자신을 인식해주길 간절하게 바라는 그는 아무하고나 아무렇게 관계를 맺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고깃덩어리’라는 말을 내뱉곤 한다.

하지만 그의 현실 인식은 거기까지다. 야만인을 발견한 뒤 사람들의 열렬한 관심을 끌게 되자 그를 괴롭히던 열등감이 어느새 사라져 버린다. 쌍둥이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똑같이 우월한 계급의 인간들 가운데 그는 보다 특별하고 싶었던 건데 그가 전부다. 타인과 다른, 조직체 속의 한 세포가 아닌 독립된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강한 욕망이 그가 경험하는 실존의 시작이자, 끝이다. 소외를 느끼기는 하지만 획일화되어 개개인의 가치를 잃어버린 인간의 문제까지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두 번째 역시 알파 플러스 계급의 헬름홀츠다. 그는 열등감에서 비롯된 버나드와 달리, 너무 뛰어난 지적능력을 갖춘 나머지 주변 사람들과의 차이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부족할 것 없는 지위와 삶의 질을 영위하던 그는 자기 내부에 끄집어내주길 기다리는 능력이 있다는 걸 감지한다. 감정공학대학에서 일하며, 사회에서 요구하는 창작력만큼만 발휘해왔지만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걸 느끼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치열하고도 강렬한 문장이나 표현으로 인간의 정신을 찌르고 꿰뚫는 것이다. 그의 막연한 바람은 사회가 내세우는 기치인 <격렬한 감정 지양>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즉,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강한 인상과 감동을 주는 것. 이는 육체적 만족과 정신적 평온함으로 유지되는 이 사회가 결코 필요로 하지 않는 능력이다.

하지만 헬름홀츠 또한 버나드와 마찬가지로 잠재의식 교육을 통해 형성된 사고를 뛰어넘지 못한다. 야만인 존이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을 때 그는 그만 이야기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는 광증과 광란과 같은 격한 감정에 관해 체제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으나, 인간다움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는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고통 또한 알 수가 없으니 이는 어쩌면 당연하다. 


그리고 세 번째가 <멋진 신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엄마”의 의미를 잘 아는 야만인, 존이다. 존은 엄밀히 말하면 체제 밖의 사람이다. 인공배양이 아니라, 임신과 출산을 통해 세상에 태어나, 엄마 젖으로 자랐고, 인디언들과 함께 생활하며 고통과 희생을 통해 거룩한 영혼으로 나아가려는 욕망을 지닌 신세계인들과는 사고와 행동이 전혀 다른 인간이다.

    

존은 신세계가 지향하는 바와 정반대 가치관을 가진 결정체다. 욕망을 억누름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없애기 위해 어릴 때부터 무한히 자유로운 성적 쾌락을 장려 받은 문명인들과 달리,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부터 윤리관을 습득한 존은 ‘순결성’에 천착한다. 환각성 도취제인 소마를 복용하게 함으로써 우울과 고독을 한 점도 남기지 않으려는 정부와 달리 존은 세계와의 단절과 고독한 고행을 원한다. 존은 획일적인 인간의 모습에서 메스꺼움을 느끼고, 죽음이 초콜릿과 같은 것이라고 세뇌당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환멸을 느낀다. 한눈에 반한 레니나를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했지만 레니나를 비롯한 문명인들은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 린다의 죽음으로 그는 놀라운 신세계의 비정상적인 행복에 결별을 고한다. 모든 인간의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총통에게 그는 신과 시와 위험과 자유와 선과 죄, 그리고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며 신세계를 떠난다.


유토피아의 어원은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이다. 어원처럼 현실 속에서 유토피아적 사회를 구현하기란 어려울뿐더러 이루어져서도 안 될 것이다. 모든 인간이 평화롭고 행복한 이상적 세계는 총통의 말대로 무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를 억압하고 제각기 다른 인간의 욕망을 기계적으로 통제하며, 누군가의 희생(희생당하는 것조차 모를지라도)이 없이는 이룩될 수 없다. 그런데 거의 모든 욕망이 충족되고, 계급에 대한 불만이 없는 사회에서 제각각 역할을 잘 수행하며, 아무도 불행하다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과연 그것이 진정 행복한 사회일까?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며 불만족의 상태가 곧 행복은 아닐 것이다. 또한 설령 그것이 진짜 유토피아라 할지라도 인간의 본성, 즉 자아실현의 욕구, 사랑하고 사랑 받고픈 욕망, 죽음에 대한 공포와 나이 듦에 따라 보다 영속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성향, 본능적 고독 등등을 모두 제거 당하거나 억제 받는다면, 그것은 인간을 위한 유토피아일 수 없다. 인간의 형상을 한 자동인형을 위한 유토피아이거나, 최고 통치자 몇 명이 보기에 아름다운, 그런 세계일 것이다.


과학기술이 무한히 발전하고 신세계가 보다 더 정교하게 조성된다 한들 스스로 채찍질을 하며 고난을 통해 높은 영혼의 기쁨을 갈구하는 인간을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기계문명의 발전이 곧 인간성 상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합리적 사고의 발달과 기술의 진보에 따라 그동안 인류는 많은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 사실이다. 인간성 회복을 위해서 존이 속해 있던 인디언 사회처럼 무지하고 야만적인 세계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만 현대문명의 발달이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무엇인지,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작가는 이 풍자적 소설을 통해 역설하고 있다.  


# by 졸리 | 2009/10/13 16:45 | 책을 읽고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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