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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에이즈 환자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이후, 에이즈는 1990년대 초반 전 세계 인류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에이즈 환자의 인권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 <필라델피아>와 같은 영화도 있었고, 무섭게 퍼지는 바이러스의 공포를 다룬 <아웃 브레이크>와 같은 영화도 있었다. 또한 흡혈귀와 관련한 소설과 영화가 갑자기 붐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이는 에이즈가 미친 사회적 파장과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다. 주로 혈액에 의해 전염되는 HIV의 특성은 흡혈귀가 되는 과정(피를 교환함으로써 흡혈귀 바이러스(?)가 전염)과 유사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20세기 말, 천형이라고까지 불리웠던 에이즈는 아직까지도 뚜렷한 치료방법이 없다. 바이러스 자체에 대한 치료약, 즉 완치제의 개발은 요원하다. HIV의 체내 활동을 억제하는 약이 있기는 하지만, 이 또한 불완전하며 평생 복용해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백신이 개발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시험단계일 뿐이다. <고맙습니다>에서 봄이가 HIV 보균자라는 사실은 모든 등장인물을 하나로 묶는 중요한 설정이다. 에이즈 환자는 보통 그 사실이 알려지면 사회로부터 격리된다. 개개인의 인권을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정부가 격리를 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자연스럽게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기가 어려워진다. 비싼 치료약값을 마련하고자 도움을 청하러 텔레비젼에 출연했던 에이즈 가족은 방송출연 이후 더이상 병원에 약을 받으러 오지 않는다고 들었다. 온 가족이 에이즈 환자라는 것이 알려진 그 가족들은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봄이가 사는 푸른도는 남의 집 밥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알 만큼 이웃 사이의 정과 인심이 중요한 동네다. 이런 동네에 이름도 낯선 전염병을 가진 아이가 있다는 것은 타인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도시민들의 경우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가 된다. 나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사람이나 집단은 배척하는 것이 일반화된 도시 사람들과는 달리, 푸른도 마을 사람들에게 봄이의 일은 그저 멀고 먼 남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 두려움에 일단 봄이네를 멀리하겠지만, 사람 사이의 인정이 중요한 그들은 분명 가책을 느낄 것이다. 그들이 과연 봄이네 모녀를 섬 밖으로 내몰까. 아니면 푸른도 품 안에 따뜻하게 보듬어 안을까. 작가는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아직은 인간다움이 남아 있는 섬 안에서 격리와 배척의 이미지를 지닌 에이즈를 통해 풀어가려 하고 있다. 더구나 봄이의 감염 이유가 다른 사람의 피를 받는 수혈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이지만, 또한 타인 때문에 피해를 당하고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것이 세상 살이다. 우리는 어떻게 같이 살아야 할까? 어떻게 하면 모두가 행복하게 함께 살 수 있을까?
혈연은 한국 사회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관계다. 자신이 선택하여 맺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며, 끊고 싶다고 마음대로 끊을 수도 없다. 석현이는 막연한 직감으로 봄이에게 이끌리고, 무조건 거부하고 무시하며 살고 싶은 석현 모조차도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는 핑계로 봄이네에 자꾸만 발길이 머문다. 이작가는 전작 <미사>에서도 묘하게 인력이 작용하는 혈연과 인지의 부조화에 대해 이야기 했었다. 핏줄에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의 머리는 기타등등 다른 이해관계에 영향을 받는다. 사람들은 보통 내 가족이라고 규정지은 틀 안에서는 한없이 너그럽고 무엇이든지 다 해줄 수 있지만, 그 틀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선 대체로 무관심하고 때론 무자비하다. 그런데 혈연으로 묶여 있음에도 여러가지 이유로 가족의 테두리 안에 포함되지 못한 사람들, 즉 <미사>의 차무혁과 <고맙습니다>의 봄이네 가족은 혈연에서 소외되고 어디에도 뿌리를 두지 못한다. 봄이 엄마가 할아버지를 극진히 보살피는 마음에는 의지할 곳이 하나도 없다는 외로움이 바탕에 있다. 푸른도를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에는 할아버지가 부모님 돌아가신 곳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외에 푸른도 사람들 말고는 그들이 속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HIV는 피를 통해 이동한다. 혈연(한 핏줄)은 같은 피를 나누었다는 동질감, 유대감에서 비롯된다. HIV 보균자인 봄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시키지 않으려고 자신의 피를 몰래 처리하는 것을 배운다. 하지만 그 피는 봄이 엄마에겐 천사의 피다. 혈연을 암묵적으로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의지하지 않으려 하는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줄 피인 것이다. 한편 성공과 체면에 마음을 빼앗긴 석현이와 석현 엄마의 핏줄(봄이)의 피 안에는 없애기 힘든 바이러스가 있다. 석현 엄마를 쏙 빼닮은 봄이 얼굴의 점을 침따위로는 도저히 지울 수 없는 것처럼 봄이 피 속에 담긴 석현이의 유전자도, 그 피에 기생하고 있는 바이러스도 쉽게 지울 수가 없다.
부처님이라는 이름으로 석현이 엄마를 부르는 것은 석현모가 원래부터 못된 성품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석현 모가 앞으로 감당해야 하는 업보를 앞서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하다. 자식, 특히 본처의 자식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녀가 불임 며느리를 맞게 될 것을 우리는 예상할 수 있다. 석현이에게 딱 적당하다고 생각했던 서울 며느리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상황에서, 봄이가 석현이의 친자식이라는 두려워했던 진실이 기어코 밝혀진다면. 이 기막힌 운명의 무게는 온전히 석현이 엄마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 된다. 너무나 똑똑하고 야무지고 귀여운 그 아이가 그러지 않아도 늘 마음에 묵직하게 얹혀 있었음에도, 영신이의 딸을 손녀로 받아들이는 일만은 죽어도 하기 싫기에 온갖 수를 다 써서 떼어놓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아이가 끔찍이도 아끼는 아들, 석현이에게 유일한 자식일 수도 있다니... 현세에 지은 업보도 돌고 돈다. 석현모가 그토록 마음에서 내치고자 했던 봄이네 모녀가 마침내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현실로 돌아오고, 죽은 연인이 저지른 실수는 살아 남은 기서의 속죄로 이어지며, 환자에게 배신당한 아버지로 인해 마음을 닫아버린 젊은 의사의 상처는 꿋꿋하게 세상과 병에 맞서는 환자 모녀로 인해 치유된다. 젊은 날의 치기로, 한 여자를 미혼모라는 주홍글자를 새긴 채 살게 한 석현은 버려진 자식이 걸린 나쁜 병을 통해 모녀에게 안긴 고통을 한꺼번에 그대로 되받는다. 결국 작가는 세상은 불공평한 듯, 공평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버린 자식의 심장으로 말미암아 입양한 자식이 새 생명을 얻게 되는, 언뜻 부조리해 보이는 삶의 조화를 이작가는 <고맙습니다>에서 역시 말하고 싶은 듯하다. 봄이의 몸에 살고 있는 몹쓸 바이러스가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 안하도록 면역이 된, 무감동의 마음을 공격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부닥치는 현세의 불운과 불행 또한 더 큰 깨달음을 위해 꼭 필요한 신의 도구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강제 키스 장면만 해도 약간의 억지는 분명 존재한다. 기서의 입맞춤은 "기서라는 안경을 통해 영신을 다시 보게 되는 석현"을 만들기 위한 극적 장치인 동시에 봄이가 HIV 보균자라는 사실을 기서가 알고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장면이었다. 또한 기서가 처음으로 봄이 모녀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했던 시작점이기도 했다. 물론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 밝힐 만한 비밀이 아니기 때문에, "이 사람 누구냐?"며 다그치는 맞선남에게 보이기 위한 키스였다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 방법이 꼭 강제로 입술을 빼앗는 것뿐이었던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극중에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죽은 연인의 환청에 시달리는 기서인데, 아무리 뚜렷한 이유가 있다손 쳐도 다른 여자의 입술을 훔치기엔 너무 빠른 것이 아닐까? "인생, 되는대로 막 살기로 한 민기서"라서 모든 게 가능하다,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영신을 사이에 둔 두 남자의 관계를 부각시키기 위해 조성된 장면,장면이라는 느낌에도 불구하고 그 와중에 나오는 봄이와 기서의 시퀀스는 좋다. 특히 지각을 밥 먹듯 하는 봄이에게 야단치며 "사는 날까지는.."이라는 말이 무심코 나왔다가, 그 말을 다시 삼키는 부분에서는 정말 울컥하더라. 6회에서 내보낸 예고편에서도 쪽마루에 마주 앉아 있는 기서와 봄의 장면이 제일 기대된다. 천사로 태어난 아이와 천사로 다시 태어나려는 아저씨라. 어찌 된 셈인지 영신과 기서의 로맨스보다는 "천사들의 이야기" 쪽이 더 끌리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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