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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에 대하여(2011) by 졸리

아이란 얼마나 신비로운 존재인가. 내 몸을 빌어 태어났지만 나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인 너. 첫 아이를 낳고 나서 누워 잠든 아이를 보며 나는 이러한 생각을 끊임없이 했던 것 같다. 너는 어디서 왔니? 너는 지금 무슨 꿈을 꾸니?


잠든 아이와 행복이 넘치는 표정으로 아이 얼굴을 한없이 바라보는 엄마. 참으로 평화롭고 행복한 풍경이다. 하지만 이 풍경 뒤에 잠투정하는 아이를 안고 마루를 2시간 동안 미친 듯이 걸었던 사연이 겹쳐진다면 과연 아름답기만 할까? 육아란 24시간 심신을 다 바쳐 치르는 전쟁이다. 말 못하는 아이와 초보 엄마는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낯선 존재에게 서로 익숙해지고 길들여진다. 그 시간이 짧으면 세 달(100). 길면, 글쎄 몇 년? 신기하고 예쁘지만 동시에 몹시도 당혹스런 존재인 아기. 특히 모든 욕구를 충족해주느라 갖은 애를 썼는데도 목청껏 아기가 울 때. 엄마는 절망감과 무력함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피해 공사장의 소음 속으로 도피한 에바의 피폐한 정신상태는 엄마라면 누구나 공감할 일이다. 애 울음소리를 듣느니 고막이 찢어지는 소음이 더 맘 편할 수 있다는 거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른다. 그 이유는 엄마라는 사람은 우는 아이를 어떻게든 달래야 하는 1차적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해 주어야 한다.

<원제: 케빈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해>는 이처럼 영원히 불가해한 존재인 자식에 대해 끝없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엄마들의 절박하고도 무력한 질문에 관한 영화다. 아기 때는 말을 못해 답답하고, 4살쯤부터 자아가 발달하기 시작하면 무작정 생떼쓰기 때문에 속을 썩히고, 초등학교 4학년쯤 1차 반항기를 지나 사춘기에 이르러 서로 딴 나라 말을 하게 되면, 엄마와 자식은 완전한 이방인이 되어 버린다. 평범한 아이도 이처럼 이해하고 소통하기 힘든데, 하물며 케빈과 같이 특별한 아이라면, 엄마는 매 순간 꽉 막힌 유리벽에 부딪히는 느낌일 것이다. 엄마와의 교감을 거부하고, 아빠한테만 사랑스러운 아이가 됨으로써 엄마와 아빠 사이를 이간질하는 케빈은 분명 문제가 많은 아이다. 케빈이 엄마에 대해 왜 그토록 적대적인지는, 영화 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어렴풋이 추측을 해보자면, 아이를 사랑해서라기 보다 의무방어에 급급하고 부담스러워하는 엄마에게서 막연하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나 또한 첫 아이를 기를 때는 온전히 내 책임의 아이가 많이 부담스러웠다. 가고 싶은 곳에 맘대로 가지 못하고 화장실까지 아이를 안고 가야 하는 식으로 나의 신체적 자유까지 구속하는 아이가 심지어 미울 때도 많았으니 말이다.

 

영화는 두 가지 이미지로 응축할 수 있다. 강렬한 붉은 색과 이에 대비되는 펄럭이는 커튼의 희미한 푸른색이 그것이다. 영화의 도입부분, 스페인에서 열리는 토마토 축제에서 에바는 으깨진 토마의 붉은 즙 안에 기꺼이 몸을 맡긴다. 여행가 에바가 누리던 열정적인 자유의 붉은 색은 침침한 붉은 조명 안에서 벌였던 짧은 섹스로 바뀌고 누군가가 뿌린 붉은 페인트의 저주로 남는다. 자유(여행)가 임신(속박)으로, 그리고 살육의 현장(케빈의 범죄)에서 붉은 페인트(속죄)로 이어지는 붉은 색의 변주가 영화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특히 토마토 속에 몸을 던지던 자유로운 영혼 에바가 피해자 엄마의 눈을 피해 토마토 수프 통조림 속으로 숨는 장면이라든가(놀라운 아이디어다) 붉은 페인트를 온 몸으로 벗겨내는 장면들은 그녀가 짊어진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를 여실히 느끼게 한다. 한편 보일듯 말듯 펄럭이는 커튼의 희끄므레한 푸른색은 미지의 존재, 케빈을 상징하는 색이다. 짙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검은 머리와 흰 셔츠를 입은 케빈은 영화를 보는 내내 희미하고 차가운 푸른 색 물음표로 남는다.
       

아이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희생이라는, 모성의 사회적 통념과 신화를 꼬집는 영화라고는 볼 수 없다. 내 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그저 질문을 던져 보는 영화다.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간 케빈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에바는 ?” 라는 질문을 쉽사리 하지 못한다. 동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피해자 가족들의 멸시와 증오, 폭행을 혼자서 감내해가며 에바는 살인자의 엄마로서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갈 뿐이다. 그 고통과 속죄의 과정 속에서 에바는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했을 때부터 케빈이 자물쇠를 주문하며 살인의 현장을 준비할 때까지의 시간을 되짚어 나간다. 어디서 어떻게 잘못되었던 것인지, ‘케빈에 대해서스스로에게, 그리고 과거의 시간들에 묻고 또 묻는다. 하지만 역시 케빈이 얘기해주기 전까진 진짜 답은 영원히 알 수가 없다.       

 

영화는 좀처럼 테이블 위로 꺼내 놓지 못했던 ?’라는 에바의 물음에 케빈이 어이없는 대답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땐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니. 이유를 몰라 끙끙 앓았던 관객마저도 허탈하게 만드는 이 대답에 에바는 아들을 힘껏 껴안는다. 최초로 아들과 동질감을 느낀 것이다. 모른다.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애초부터 인정했다면 엄마라서 느껴야 하는 무조건적인 책임감과, 아들이라서 행하는 부조리한 반항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지지 않았을까. 폭풍이 오기 전날 밤처럼 두근대는 가슴으로 사춘기 진입 직전의 아들을 바라보는 이 엄마에게 <케빈에 대하여>는 두고두고 곱씹게 될 영화임에 틀림없을 듯하다.

+ 황폐해져 가는 에바를 연기한 틸다 스윈튼은 역시 예상대로 훌륭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한 번 보면 잊히지 않을 새 얼굴, 에즈라 밀러의 영화로 더 기억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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