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포토로그


응답하라, 1997 (2012) by 졸리

추억을 파는 모든 방송 프로그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첫사랑을 찾아본다거나 스타의 동창생을 모아놓고 얼굴 알아보기 테스트를 한다거나 하는 추억여행, 왠지 낯간지럽고 어색하다. 그래서 추억의 도시락을 파는 식당이라든가, 만화방과 같은 곳도 찾아가 볼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 느낌, 그것을 온전히 간직하는 쪽이 더 좋을뿐더러, 자고로 과거를 되새길 때는 좋았던 기억만 소환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묻어두었음 싶은 기억들도 딸려 나오는 법. 괜히 돌이키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기억이 딸려 나오기라도 하면 씁쓸한 기분을 한동안 곱씹어야 하니까 웬만하면 사양하고 싶다. 

 

90년대 후반 학창시절을 보내고 오늘날 30대가 된 이들을 향한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이 큰 인기를 얻었다. 고증이 세밀하다는 이야기, 빠순이 문화의 태동을 재조명한다는 분석,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몰입해 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는 감상까지. 향수를 유발하는 드라마들이 그간 많았음에도 90년대의 청소년 문화를 본격 재조명한 드라마가 없었던 탓에 주목을 많이 받았다.

 

새롭다 할 줄거리는 아니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절친 시원과 윤제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다. 윤제 부모님이 죽고 시원의 부모가 윤제 형제를 옆에서 돌보게 되면서, 시원과 윤제는 남매나 다름없이 함께 자란다. 관계의 전환은 두 사람은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윤제가 시원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되면서부터 일어난다. 티격태격하던 친구에서 연인으로의 발전 과정은 순정만화의 단골소재인데, 이 드라마에 특별한 점이 있다면, 정신적 성장이 느린 시원이 인지 인지 하는 오빠들에게 단단히 빠져 있어 주변을 둘러보지 못한다는 설정에 있다. 윤제의 마음을 따라잡지 못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하는 시원은 꽤 독특한 여주인공이다. 이름처럼 시원시원하고, 정도 많은데다 뭣보다 의리파다. 이 드라마의 미덕이라면 시원을 비롯한 여자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주도적이라는 데에 있다. 공부는 못할지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정직하고 순수하게 미쳐 있는, 그녀들은 뭐 하나 빠질 것 없지만 우물쭈물하는 윤제나 준희보다 훨씬 생동감이 넘친다.    

 

순정만화 정서가 기본이니 만화의 한 페이지를 보는 것 같은 장면들이 간간히 등장한다. 윤제와 시원의 성장기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그리고 이어지는 수도가 키스씬 같은 것이 일례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가장 만화스러운 부분은 윤윤제, 윤태웅 형제의 초현실적 능력이다. 친구들과 잘 어울려도 전교 일 등을 놓치지 않을뿐더러 한 여학생만 맘에 두고 있는 순정남 윤제. 안철수를 비롯해 여러 능력자들이 조합되어 있는 수퍼히어로인데다, 잊지 못하는 죽은 연인의 여동생에게 키다리 아저씨 노릇을 자처하는 윤태웅. 이 윤씨 형제는 모든 여학생들의 로망을 대변한다. 윤제를 마음에 두고 있으면서도 어른스럽게 티 내지 않고 시원에게 힘이 되어 주는 준희는 윤씨 형제보다 어쩌면 더한 판타지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완벽남들보다 더욱 내 눈길을 끄는 것은 입에 자물쇠를 채우지 않으면 쉴 새 없이 떠드는 방성재와 서울에서 전학 온 야동 편집의 달인, 학찬 커플이다. 성재와 학찬, 시원과 시원의 절친, 유정이가 한 자리에 모여 신나게 떠들고 놀 때, 내 기억은 곧장 사소한 일에 웃고 울던 학창시절로 돌진해 버렸다. 로맨스보다 더 그리운 것은 역시 그 시절 친구들이다.             

 

90년대 후반,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생활을 시작한 나로서는 드라마 속 추억 여행에 공감한다기 보다 아, 그랬구나, 하고 구경하는 입장이다. 추억 여행에 동승할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제작진이 매 회 힌트를 던지며 궁금증을 유발하는, “시원의 남편은 누구인가?” 또한 그다지 관심사가 아니니 이 드라마에 대한 나의 응답은 끝까지 시큰둥, 시원치 않았다.  

 

1980년 말 90년 초의 내 학창시절은 이 드라마와 많이 달랐다. 전교조가 있었고, 최루가스 냄새가 있었고, 철학에세이와 태백산맥이 있었다. 공부를 한다고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것이 죄스러운 시절이었고 전교조 리본을 단 선생님을 옹호하는 아이와 아닌 아이들의 치열한 공방이 있었다. 나는 일류대학-일류인생, 삼류대학-삼류인생으로 사람을 재단하는 선생님과 부모님에게 격렬하게 저항하며 그저 공부하기 싫었던 마음에 아주 그럴싸한 핑계를 댔고, 그럼에도 아무 대안이 없는 자신에 실망하고 또 실망했다. 대입 스트레스를 핑크 플로이드나 반젤리스,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를 들으며 풀었다. 내 취향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비주류였고, 때문에 학교에선 늘 주변인이었다. 취향을 나눌 친구가 없었으니, 빠순이 문화 같은 건 있었어도 공감하지 못했으리라.

          

드라마의 줄거리보다는 나이 듦에 따라 달라지는 시간에 대한 자각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했다. 마냥 길 것만 같았던 학창시절은 지금 돌이켜 보면 그렇게나 짧은 수가 없고, 그렇게도 힘들었던 입시 지옥의 경험도 되새겨 볼수록 별 거 아닌 듯 느껴진다.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드는 시간이 인간의 기억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리 없다. 시간을 통과하면 즐거운 기억이든, 괴로운 기억이든 한없이 가벼워져 간다. 새삼 얼마나 내가 잘 잊는 인간인지를 깨달았다. 추억을 돌이키기 싫었던 건 어쩌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걸 자각하기 싫었기 때문일지도.  

 

<응답하라, 1997>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지만, 만약 <응답하라, 1987>이었다면 나는 적극적으로 호응할 수 있었을까? 계속 자문하게 된 질문이다. 자꾸자꾸 기억을 소환해서 추억의 용량을 늘어야 한다는 절박한 감정이 생겼다. 어쩌면 망각해야 할 기억보다 돌이키고픈 추억이 더 많지 않았을까, 무언가 보석 같은 기억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을까 하는 조바심이 들었다. 그리고 미래의 내가 언젠가 불러줄 지 모를 오늘을 잊지 말아야 함을 줄곧 실감했다. 아마도 나에게 이 드라마는 시간의 절대적인 힘과 기억의 소중함, 그리고 추억을 소환하기 위해 꼭 필요한 무언가로 남을 것 같다. 그것이 호출기(삐삐)이든, 오래된 사진이든, 먼지 쌓인 CD들이든.

 

             

+ 시원의 남편이 누구인지 끝까지 확인하지 않을 듯. 흥미가 떨어져서 마지막 회 감상은 안 하는 걸로. ^^ 그런데 예상을 전혀 벗어나 시원의 궁극의 꿈이 성취된 거라면 어쩌지. 안승부인이 되는 결론이라면 정말 상큼+황당하겠다.

+ 올해 가장 네이밍 센스가 좋았던 드라마.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시청자의 적극적 호응을 바라는 듯한 뉘앙스까지. 단연 최고!!
    


덧글

  • 아이참 2012/09/24 08:31 # 삭제 답글

    류덕환군 검색하다가 블로그 들어왔는데 좋은글이 많네요
    응답하라 저도 띄엄띄엄 봤는데 시간내서 몰아보려구요. 저도90년대 후반엔 이미 대학졸업후 회사 다니고 있던터라 저 시대에대한 감흥은 없지만 길게만 느껴졌던 학창시절을 돌아보게 하더라구요. 고3일요일 자율학습 빼먹고 신해철 김광석 콘서트 다니던시절. 담다디에 열광하던 여름!!ㅎㅎ.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 졸리 2012/09/24 09:41 #

    앗, 저도 요즘 류덕환군 찾아 보는 재미로 살아요. ㅎㅎㅎ 20대 중반의 청년이 이렇게 연기를 잘하면 나중에 얼마나 더 잘하려고. 이런 마음으로 보고 있죠. ^^

    <응답하라 1997>은 초반이 훨씬 재미났어요. 로맨스가 본격화되기 전, 친구들 사이의 우정이 세밀하게 그려지던 부분이 좋았죠. 지금은 어디서 뭘하고 있는지 모를 친구들이 생각나기도 하고...윤태웅/윤제 형제가 시원을 사이에 두고 애틋/애절한 줄다리기를 시작하면서부터 흥미 반감. 일단 너무 식상한 소재라서요. 형제와 한 여자의 삼각관계란, 고전 중의 고전이죠.

    제가 고3 때 김현식씨가 별세했는데, 그때 우리 반 학생 중 하나가 모의고사 시험날 결석한 적이 있어요. 시험도 빠질 만큼 충격이 컸던 거죠. 그때 이런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난 누군가를 저렇게 깊이 좋아할 수 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좋아한다 생각하는 모든 것에 미지근한 저라는 인간은 시간의 힘 앞에서도 불변인 듯하네요. ㅎㅎㅎ
  • 완소졸리 2018/03/12 17:49 # 삭제 답글

    정말 오랜만에 들러요. 여전한 필력에 백분 공감하고 갑니다. 님의 글에 응답하듯 1988 시리즈가 벌써 이년전에 나와 공전의 히트를 쳤지요.^^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