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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연애의 모든 것> 음펨바 효과 by 졸리


드라마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영화보다 캐릭터에 좀 더 깊이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와 달리 호흡이 긴 드라마의 경우 이야기 구조 상 시종일관 긴장감 넘치고 흥미진진할 수 없으므로 캐릭터적 매력이 없으면 흥행하기 어렵다. 잘 만들어진 캐릭터는 50부작 이상의 드라마를 오로지 캐릭터의 매력 하나만으로 끌고 나갈 힘을 가질 수 있으니, 이병훈 감독의 사극 대표작, <허준>, <대장금> 등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심지어 몰입하는 캐릭터의 결말만을 지켜보기 위해, 극의 완성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라며 시청하게 되는 드라마들도 많다. 우리나라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다소 과장되고, 때론 너무 전형적이며, 종종 상식 밖으로 극단적인데, 이는 초반 시청률 확보를 위해 시간과 돈을 쏟아 붓고 후반부는 관성에 의한 시청에 기대는 제작습성 때문이다. 캐릭터의 특성과 매력을 극대화하려다 보니, 직업이나 배경, 그리고 성격적인 면에서 보다 드라마틱한 주인공들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드라마의 성패가 주연 배우들의 캐스팅(캐릭터와의 적합도)에 좌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리라.


아무튼 <내 연애의 모든 것>을 시청하며 다시금 느끼는 것은 흥미로운 캐릭터가 극 전체에 미치는 위력이다. 깔끔한 연출, 극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배경음악, 주연 배우들의 연기, 소소하고도 톡톡 튀는 재미가 가득한 대본 등등 <내연모>의 깨알 같은 장점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주인공 김수영의 독특한 매력은 이 극을 끌고 나가는 최대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까칠, 오만방자한 동시에 지질하고 소심하면서도 아이같이 순수한 인물이 그 동안 없었던 것은 아니나, 김수영은 이런 성격에 날카로움을 더했다. 순간순간 비치는 냉철한 지적은 그의 독설과 안하무인적 태도가 단순히 성격적 결함이 아닌 많은 사고와 판단의 산물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물론 가끔은 그리 적절치 않은 어려운 단어들을 단지 아는 척하기 위해 사용하는 듯하고, 타인에 대한 비판에 비해 자신을 향한 반성이 모자라 균형감각이 좀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의 말 속에는 늘 뭔가 다시 곱씹어 넘겨야 하는 뼈가 들어 있다.


<7
>에서는 김수영을 애써 거부하며, 자칭 진보 노민영이 스스로가 만든 틀 속에 안주하고자 하는 모습이 보여졌다. 이는 자신들이 추구하고 있는 가치와 이상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진보가 곧잘 빠지고 마는 편협의 함정을 잘 드러낸다. 몸과 머리가 따로따로인 노민영의 미적지근한 태도 역시 물질적, 속물적 가치 추구와 이상적 지향점 사이에서 종종 애매모호한 선택을 하는(특히 개인적인 부분에서) 진보주의자들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진보, 혹은 사회변혁 운동가들에게 환멸을 느끼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이러한 양면성이다(여기서 등장한 보리의 촌철살인 멘트, Two-Faced!). 기대가 있는 곳에 실망도 있는 법이라, 진보의 위장술과 맨 얼굴에 대한 실망은 화장 떡칠한 얼굴을 뻔뻔하게 들이미는 보수골통 쪽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노민영은 대한국당 괴물들을 적으로 단정하지만, 사실 아메리카노 커피를 즐겨 마신다는 이유로 진보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비난하는 우리나라의 자칭 진보들이야말로 진보의 발목을 붙들고 진보를 진보하지 못하게 만드는, 진보의 최대 적이다. 진보의 편향성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닌데, “내 편이 가장 무섭다는 노민영의 말 속에는 틀을 벗어나는 자기 편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진보의 냉혹한 편협함이 잘 나타나 있다.


진보에 대한 간접적이고 다층적인 해부와 비교하자면, 보수 진영에 대한 풍자는 바보 문봉식을 너무 전면에 앞세운 나머지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희화된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7>에서 김수영과 대한국당 고대표와의 비밀 회동 장면으로 인해 새로운 기대가 생겼다. 김수영이 고대표를 두고 언급한 음펨바 효과”. 뜨거운 물(실은 35도 정도의 미지근한 물)이 먼저 언다는 역설. 뜨거운 가슴의 정치인이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의 비현실성에 절망하고 자신이 속한 진영의 논리에서 허점과 모순을 발견하고 방황하다가 결국 급 식어버리고 돌아서게 된다는, 대한민국 보수의 탄생 설화. 권력 없이는 변혁이고 발전이고 모두 공허한 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이들이 현실과 타협하고, 힘의 논리에 매몰되어 가면서 변질되고 더러워지고 그러다가 나중엔 무엇을 위해 권력을 잡고, 무엇을 위해 정치를 하려 했었는지 모두 망각하게 된다는 건 정치판에서 흔하고 흔한 이야기다.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사람들 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나 마오이즘에 경도되지 않았던 이가 없었고, 이에 실망하고 좌절하지 않은 이 또한 없었다. 비판이 환멸로, 환멸이 부정으로 바뀌는 건 금방이다. 그나마 사상적 좌절에서 비롯된 변절이라면 다행이다. 돈의 힘에 굴복한 이들의 수는 아마 셀 수도 없을 것이다.


간덩이가 부었는지 변절자라 고대표를 비꼬는 김수영은 권력을 탐하는 능구렁이 정치인도, 그렇다고 순수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다가 언제고 급 식어버릴지 모르는 초짜 정치인도 아니다. 어디에도 속하려 하지 않아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김수영은 고대표에게도 민우당 대표에게도 매력적인 존재다. 기성 정치인들에게 염증을 느끼는 많은 유권자들을 공략하는데 이용하기 좋은, 모두까기 인형이라는 얘기다. 김수영과 고민영의 사랑 역시, 정치권에서 이용해 먹고자 하면 얼마든지 활용 가능한 아이템이 될 것이다. 사상적 차이를 극복한 사랑. 보수와 진보의 화해와 연대. 까자면 한도 끝도 없이 깔 수 있지만 미화하려 들자면 또 한없이 아름답게 포장될 수도 있다.

정치를 계속하겠다 결정한 이상 김수영에게 입장을 정리해야 할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편가르기로 정체성을 확보하는 정당정치 시스템 속에, 여기저기서 입질을 해오고 있는 이 시점에서, 김수영의 선택은 어떠할지 자못 궁금하다. 한 옥타브의 음을 끝까지 온전히 낼 수 있는, 정치판의 생존 법칙에 물들지 않는, 새로운 스타일의 독보적 정치인을 김수영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지소화기 커플의 연애 진도는 물론이거니와 정치인 김수영의 미래 또한 점점 더 궁금해진다.


덧글

  • 2013/05/07 16:4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5/08 10:0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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